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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상우 개인전 - Moving Realism

2007.11.22 - 12.26
SangWoo Keem



SangWoo Keem
 l Möbius City 
지구 밖에서 세상보기 : 홍대입구
2007
캔버스에 유채
162.3cmx130.3cm


버려진 꽃과 그려진 꽃, 예술과 자연에 관한 오래된 질문에 대하여

-무빙 리얼리즘(moving realism)과 낭만적 리얼리즘-

아름다운 풍경. 그런 풍경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강렬한 햇빛을 받고 서 있는 강변의 여름 나무들, 아침 햇살에 빛나는 너무 눈부신 바다, 소실점으로 사라져버리는 길들, 부드러운 벽. 그러나 그런 풍경들은 내가 그들의 바깥에 있을 때만 거기에 있다. 내가 그 아름다움에 끌려 거기에 있을 때, 풍경은 사라져버린다. 풍경은 내가 뛰어들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나는 풍경에 의해 소외될 때 비로소 아름답다. 풍경과 나의 거리.1)
                     

-함성호 <너무 아름다운 병> 중에서-

 

복권된 회화의 시대에, 회화는 이전의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는 새로움의 강박관념을 숙명처럼 지닌다. 그러나 아서 단토(Arthur C. Danto)의 예술의 종말에 관한 아포리즘은 예술에 관한 유연한 태도를 갖게 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의 종말은 운동들의 종말과 선언문들의 종말을 의미하며, 그것은 예술이 취해야 할 특정한 역사적 방향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가들은 이제 어떤 경우라도 미술이 실천하여야 할 유일하게 참된 형식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예술의 종말은 곧 예술가들의 해방인 것이다.

김상우의 회화는 어떤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 예술작품이 되기 위한 특별한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상투적이며, 가장 인습적이라는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리얼리즘 회화를 보여준다. 그는 시간을 영원히 박제화하는 전통적인 재현 위주의 리얼리즘 회화에 대한 반기 혹은 자구책으로 ‘무빙 리얼리즘’(Moving Realism)이라는, 어쩌면 낯설지 않은 개념을 만들어낸다. 예술의 오랜 욕망으로서의 움직임의 모티프는 입체파와 미래파, 구성주의와 같은 20세기 전반기의 예술사조에 의해 도입되어, 현대미술을 생산적인 실험과 투쟁의 장으로 변모시킨 바 있다. 따라서 움직임의 도입이라는 그의 형식적 테제는 해묵은 논쟁만을 야기 시킬 뿐이다. 더불어 이번 작품들은 예술미와 자연미의 관계, 미메시스와 재현 그리고 시선과 응시에 관한 오래되고 미해결의 문제를 환기한다. 물론 그의 이번 작품에서 이런 문제들이 심도 있게 전개되거나 진척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빙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회화를 명명한 김상우의 작업이 이 시대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이번 전시에서 김상우 회화의 지향점은 움직임(moving)이다. 회화에서 움직임이란 시간, 속도, 스냅샷, 순간성, 왜곡, 파노라마, 탈원근법, 탈중심, 탈주체 등의 개념들과 상관관계를 갖는다. 회화에서 움직임의 적용 혹은 도입이란 예술에서의 탈주를 의미한다. 그것은 미메시스로부터의 탈주이며, 재현으로부터의 탈주이다. 그가 ‘무빙 리얼리즘’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회화적 기법으로는 첫째, 파노라마라는 영화적 기법과 스냅샷이라는 사진 기법, 둘째, 탈중심적 주체의 설정에 따른 시각의 불완전성에 천착한 이미지의 왜곡(왜상), 셋째, 빠른 붓질을 이용한 속도감의 표현 등으로 축약된다. 일차적으로 ‘무빙 리얼리즘’ 회화는 대부분 육안의 시각이 아닌 카메라의 시각에 근간한 것이며, 때로는 몽타주 기법이 가미된 포토리얼리즘 회화라고 볼 수 있다.

‘무빙 리얼리즘’이라는 작가만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런 형식적 탐구가 그의 작업의 본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의 작품의 본질은 작가가 러시아 상페테르부르크 체류 시절을 담은 일련의 작품들에서 보여 지는, 마치 라파엘전파의 회화에서 풍겨 나오는듯한 데카탕스(décadence)와 센티멘탈리즘과 페이소스(pathos)의 감수성 -어떤 작가와 작품에서는 치명적으로 해로울 수 있는- 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들 속에서는 풍경도 인물도 그의 감성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기 위한 장치로 드러난다. 그 점이야말로 김상우 회화가 가지는 본성이자 장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무빙 리얼리즘의 첫 번째 작품은 <다소 절망적인 고백> -갤러리에는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영혼에 상처를 남기는 방법’이라고 적혀있다- 연작이다. 이는 문학적 내러티브와 영화적 스틸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문학의 회화화 혹은 영화의 회화화 -영화가 문학을 내포한다고 볼 때, 후자에 더 가깝다- 라고 볼 수 있다. 영화적 스틸장면은 리얼리티를 가장 잘 포착하기 위한 적절한 기법인 스냅샷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선택적 스냅 화면은 자체의 완결성을 지향하지 않으며, 전체 플롯의 하나의 유니트로 자리매김 된다. 그것은 관자로 하여금 유동화된 시각 즉 파노라마적 시각 체험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대상의 완전한 상징성이나 질서를 표현하기 위해서 화면을 구성했다기보다는, 일정한 시간에 자의적인 시점에 따라 보여 지는 대로 프레임을 설정하고, 시간의 흐름 안에 있는 우발적인 체험에 몸을 내맡기는 화면을 구사한 것이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각도로 잘려진 화면과 산발적인 디스플레이 등 시점을 상대화하고 제한적으로 만듦으로써, 전체를 포착하는 이상적이고 중심적인 원근법적 시점이 부정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이로써 현대적 주체의 탈중심화를 구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훨씬 더 리얼리티에 가까운 것이 된다.

그의 작품에서 이런 형식은 자신의 로망인 사랑과 예술에 대한 담론을 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환상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여자에게 사랑의 기호로서의 실제의 꽃은 거부되었지만, 버려진 꽃이 그림이 되었을 때 애초의 맥락을 떠난 꽃(그림)은 그녀에게 감동을 선사하게 된다. 버려진 꽃과 그려진 꽃 사이의 경계와 간극에 대한 사유는 결국 미와 자연, 예술과 자연의 우월성에 대한 미학의 오래된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은연 중 아름다운 풍경을 보곤 최대의 찬사로써 ‘그림 같다’라는 습관적 멘트를 날리는 우리들은 이미 예술이 자연보다 우월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헤겔에 의해 가장 집요하게 주장된 바 있다. 그는 자연미는 불완전하여 그것이 완전한 아름다움에 도달하려면 무언가가 보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적어도 르네상스 화가들은 예술미가 자연미를 모방한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아직 자연의 우위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 관계를 뒤집어, 예술의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정신 즉 이데아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제 자연미는 예술미의 모범이 아니라, 그것의 불완전한 재료일 뿐이다. 어쨌거나 예술은 실제의 꽃을 더욱 아름답고 섬세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미의 정점의 순간을 고착시켜 이상화한다. 예술로 승화된 꽃의 우월성, 이것이 비단 작가만의 사유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덧붙여져야 할 것이 있다면, 예술과 자연은 어쩌면 더 이상 대립하는 차원의 이분법적 구도의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보충하며 닮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치 예술은 자연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충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그리고 꽃이 아름답지만 그것이 바니타스(vanitas) 즉 허무(죽음)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양가성의 측면을 내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두 번째 연작은 <뫼비우스 시티>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진을 찍고 이것을 다시 몽타주함으로써 카메라 기법의 난점을 상쇄한다. 이 연작은 전후 좌우가 뒤바뀌어도 상관없는 그림, 고정된 시점이 사라진 그림이다. 도시는 볼록렌즈를 통해서 본 것처럼 왜곡되어 있고, 이 왜상(anamorphosis) 역시 탈주체와 탈중심이라는 시각의 현대성의 사유를 보여준다. 또 이 왜상은 그의 세 번째 연작 <비만>에서도 드러난다. <비만> 연작은 요정 같은 미모와 깡마른 여배우의 표상인 오드리 햅번, 세기를 초월한 섹시함과 백치미로 여전히 각광받고 있는 전설적인 마릴린 먼로라는 헐리웃 신화의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녀들은 기존에 우리가 보아오던 친숙한 이미지가 아닌 뚱뚱한 몸매로 드러난다. 실제와 다른 먼로의 풍만한 육체는 보는 각도에 따라, 45kg, 75kg, 100kg이 된다. 이 그림은 16세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대사들>을 환기한다. 앞에서 보면 남근 모양의 길쭉한 물건이 옆에서 보면 정상적인 해골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이 작품은 광학의 발전을 포함한 당대의 시각적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 작품의 중요성은 남근()과 해골(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와 같은 양가성의 개념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비만> 연작 역시 시점에 따른 유동적인 바라보기를 통해 미의 기준에 관한 고정관념을 파기하는 한편, 지배체제에 의해 사육된 ‘다이어트-마른 여자’ 이데올로기가 함의하는 바를 직시하게 하며, 이에 저항하는 전복적인 사유를 보여준다. 이런 왜상은 표면적으로는 인간 시각의 불안정성과 모호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존재론적 결핍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앞선 도시와 비만 연작에서 나타나는 왜상들은 시선(eye, look)과 응시(gaze, regard)에 관한 라캉적 사유를 촉발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인간이 응시 하에 있음을, 수많은 방향으로부터 보여 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시각예술에서 응시란, 바로 작가가 다양한 종류의 반영과 굴절들을 통해 외관의 리얼리티를 시각적인 수수께끼로서 재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응시는 단지 시각적인 수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예술적 메타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상우의 작업은 라캉주의자의 언급처럼, 단순히 예술이 모방충동의 미메시스적 산물이 아니라, 의식 밖의 재현되지 않은 영역을 다루는 것이라는 측면을 반영한다. 작가에게 응시는 그의 작품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자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창조행위는 재현이 아닌 욕망의 대상인 응시가 주체의 스크린을 통해 기입되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상우의 작품에서 일어나는 응시가 강력하고 막강한 종류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김상우의 작품이 견고하기는 하나 풍요롭지 못하다는 점과도 연관된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레핀과 같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와 렘브란트 류의 플랑드르 회화의 차이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는 인체해부학에 근간, 뼈와 구조의 정확성에 천착한 매우 성실하게 잘 그려진 그림이지만, 살을 통해 육체에 접근하는 플랑드르 회화의 투명성과 생명력 그리고 밀도와 풍요로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전자에 가까워 보이는 김상우의 작품은 사물의 기계적인 모방과 재현에 머무를 수 있는 부정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형식상의 문제는 결국 내용에 영향을 미친다. 즉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삶의 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이 어려우며, 이는 곧 철학적인 사유 혹은 시대정신을 담보할 수 있는 작품으로 진화하기 어렵다는 결과로 귀착된다. 김상우는 예술제작을 통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휴머니즘의 성향이 근절될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회화가 영혼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라는 소박하고 오래된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을 때 그것을 주장하기에 가장 휴머니즘적인 장르가 바로 회화라는 오래된 믿음을 보여주는 작가로 그를 떠올리기에 충분해 보이는 지점이다
                                                                                                  
유경희(미술평론가/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