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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박형근 개인전 - Imaginary Journey

2008.06.12 - 07.13
Hyung-geun Park



HyungGeun Park | Tree # 5
2007
C 프린트
103x130cm

미학적 영혼을 위한 자명한 산책

 

나는 메이플소프의 <어떤 사람들>에 나오는 내 사진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본다. 나는 갈망을 가진 채 내 사진을 볼 수 없으며, 사진에 있는 사람에 관해 환상을 가질 수 없다. 소재와 표면을 동일시하는 사진의 에로스가 정지된다. 내가 느끼는 것은 나와 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다. 나에게는 메이플소프가 찍은 저 사진의 표정이 정말 ‘나의’ 시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카메라를 위해 만들어진 시선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이자 감탄해마지 않는 어느 사진작가에게 협조하려는 노력과, 나 자신의 위엄을 지키려는 노력 사이의 불안정하게 타협한 결과인 것이다. 나는 메이플소프가 찍은 것처럼 보인 적이 있었던가 의심한다. 혹은 다음번에 그가 내 사진을 찍을 때에도 이것과 똑같이 보일까 의심한다. -수잔 손택 <어떤 메이플소프들> 중에서-

 

내 안의 무언가에 충격을 주는 매우 무해한 사진들이 있다. 무해하다는 것은 불편하거나 긴장감을 주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해롭지 않은 충격은 이미지의 황홀에 대한 박형근의 취향으로부터 기인한다. 예술은 자연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충한다는 니체의 말은 그의 작업에 오면 자연을 감각적 미학적으로 보충한다는 말로 전환될 수 있다. 이러한 박형근 작품은 감정을 자극하는 동시에 억제하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기묘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풍경은 더 이상 휴식과 평온의 이미지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낯설고 긴장감 넘치는 이미지들만도 아닌, 어쩌면 중립과 투명성의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는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범속한 각성, 응시하는 사물

앗제가 종종 몇 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장소를 방문하여, 이전에 찍은 건물의 다른 양상들을 다시 찍은 것과 마찬가지로, 박형근 역시 한 장소를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찾고 또 찾은 후에 사진을 찍는다. 사진은 절대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며, 마치 일본의 전통극 노()의 배우가 기모노의 기다란 치맛자락 끝에 오래된 시간, 즉 영원의 시간을 질질 끌어 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술가에게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조차 발견이 아닌 조우이며, 자신의 오래된 영혼과 대면하는 일이다. 사진은 순간이 아닌 모멘텀을 담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멘텀은 ‘영원한-혹은 오랜-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쨌든 박형근은 이번 작품에서도 자신만의 실존적이며 미학적 쾌를 찾기 위한 지난한 열정과 극명한 모험정신에 근간한 영혼의 순례를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형근의 작품은 평범하고 하찮으며, 낡고 우연한 것 또는 숨겨진 것에서 새로운 것, 놀라운 것을 감지해내는 ‘범속한 각성’(벤야민)과 같은 인식의 계기를 내포한다. 그의 작품은 ‘범속한 각성’과 더불어, 일견 그와 모순되어 보이는 도취의 경험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눈 내린 나뭇가지에 나비, 인공호수의 공작새, 눈 속의 종이 성(), 바다에 뜬 여러 개의 달 등은 일상적으로는 서로 만나기 어려운 대상들의 결합이다. 사실, 이러한 전치는 현대미술가들에게 더 이상 생소한 방법이 아니며, 오히려 상투적일 정도로 자주 일어나는 기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형근이 보여주는 전치는 적극적인 이미지의 결합이 아닌, 아주 미약하고 사소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자연물인지 인위적인 연출인지 조차 구분을 불분명하게 만듦으로써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해체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이러한 경계의 이미지들을 노골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그의 이미지들은 꿈같이 모호하고, 영화처럼 투명하다. 꿈같이 모호하다는 것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표들이 의미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처럼 투명하다는 것은 그 이미지가 선명한 영화처럼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기표들의 부유란 그것이 기의와 만나지 못해 기호가 되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의미 없음’과 ‘지각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쩌면 코드화되지 않은 더 많은 의미영역과 지각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박형근의 작업은 의미가 고정되지 못하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초현실주의 사진과 닮아있다. 그것은 현실을 넘어선 세계,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세계, 현실에서는 조성될 수 없는 현실을 넘어선 이미지의 세계이다. 박형근 역시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실을 꿈의 자기장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이 시적 포에지로 승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초현실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순간적인 흡입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흡입력은 그의 풍경 시리즈를 여전히 내밀하고 비의적인 지점에 서 있게 한다. 이 흡입력은 일종의 라캉 혹은 메를로-퐁티의 응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세잔느가 자신의 작품을 두고 “풍경이 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생각한다”고 말한 것에 주목한 메를로-퐁티가 설파한 응시의 모멘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풍경이 되어야만 상투적인 풍경 사진에서 벗어나게 되며, 그 풍경은 뭉클거리는 육체를 지닌 하나의 생명체로 드러나게 된다.

 

도취와 관능에서 관조와 사색으로

영국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박형근의 작업들은 예술적 의도와 스타일에서 변모를 겪고 있는 중이다. 박형근의 이전 작품들은 매우 회화적이다. 현대미술에서 사진은 회화를 모방하고 회화는 사진을 모방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이 회화적이라는 것은 화면의 촉각적 요소와 색채의 유희를 통한 이미지의 과잉을 뜻한다. 이 이미지의 과잉은 존재론적이며 심정적인 음색인 풍크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이전 작품들은 대상에의 완전한 몰입, 일종의 물아일여의 응시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점철되어 있다. 작가는 일종의 ‘사물 되기’의 실천적 행위자가 되었다. 그는 이미 풍경이 되고, 숲이 되고, 고인 물이 되었다. 그래서 풍경은 관능이 되고, 육체가 되고, 페티시의 결이 되었다. 그로써 그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단순한 풍경사진이 아닌, 인간의 결여를 보충해주는 도착적이고 강박적인 회화적 사진으로 자리 매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박형근의 이전 작품들이 곧바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였다면, 이번 작품들은 서서히 감정을 배제하는 이미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 작품들이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공감각적인-시각과 촉각 심지어 청각까지 사용되는-것들이었다면, 이번 작품들은 훨씬 더 간소해졌고, 더 신중해졌고, 다소 금욕적인 반면, 덜 인상적이고, 덜 기교적이고, 덜 활력적인 것이 되었다. 어쩌면 이전 작품이 감정이입을 야기하는 나르시시즘적인 도취의 이미지였다면, 이번 작품은 지적인 동시에 초연한, 그리하여 깊이 사색하도록 만드는 이미지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색적인 예술은 관객에게 어떤 자제심을 유도하는 예술, 다시 말해 손쉬운 만족을 뒤로 미루게 만드는 예술에 다름 아니다.

이전 작품이 일종의 낯 설은 스펙터클, 즉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했던 만큼 과잉과 잉여의 이미지였다면, 이번 작업은 더 많은 여백과 결여를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거리 두기, 무심함, 관조를 불러일으키는 등 내적인 요소에 의한 균형을 중요시하게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전 작품은 자연에 감각적인 측면을 보충해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미를 생산해내는데 착안, 그로써 상징성과 알레고리적 요소를 가미했다. 반면, 이번 작품들은 좀 더 감각적 쾌락을 비껴가고, 황폐해 보이고, 건조해 보이지만, 좀 더 영속적이고 단조로운 이미지들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이미지들 중 어느 쪽이 더욱 환상적인 에너지를 가져다 주겠는가?

 

자신을 타자화하다, 수많은 도플갱어들

여름 속 눈 내리는 풀밭에 누워있는 남자, 어린아이처럼 투명어항으로 된 모빌을 들고 있는 소년 같은 남자, 대낮에 인공 달을 들고 서 있는 아이 같은 남자, 버려진 꽃을 옆에 두고 불꽃을 마주한 남자, 새집을 들고 눈 속에 서있는 남자, 도로 곁에 덩그마니 앉아 있는 남자, 아니 남자들이 있다. 이제 한 남자로는 부족하다. 많은 남자들은 작가의 분신(alter-ego), 도플갱어들이다.

이런 박형근의 자화상은 특별히 불편하다. 도대체 이 낯섦과 불편함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박형근의 자화상은 기존의 자화상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 그 자화상은 작가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자화상이 일반적인 자화상과는 다른 이유는, 우선 화면을 응시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고, 모든 사진은 전혀 한 사람임을-그것이 작가자신이라는 사실마저도-눈치 채지 못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단지 이 점들만이 이 작품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작가 스스로 하나의 소재, 일종의 오브제로 등장한다는 느낌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정작 자신은 카메라를 지나치게 의식, 소통이 피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찍는 주체로서만 존재해왔던 자신이 피사체로 둔갑하면서,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합일-이것 역시도 응시-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외면과 회피가 예술가로서의 그의 실존적 신념을 얼마간 희석시킨다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화상은 우연성과 우발성이 배제된 철저하게 계산되고 잘 짜여진 화면에 속한다. 앞선 작품들과는 달리, 시선을 카메라로 향하고 있지 않고 등지거나 외면하는 것, 그리고 화면과 외화면을 케이블이 연결하고 있다는 점 등은 오히려 외화면에 대한 확장된 시각을 담보하고 있다. 단순히 완결된 화면을 추종하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시각적 확산 혹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게 하는 전략적 차원 같은 함의가 내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자화상은 다른 오브제와 결합되어 단순한 현상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로의 지향성을 가시화하고 있다. 예컨대 대지의 울림을 듣고 있는 작가의 모습에서 보여지는 자연과의 생태적인 교감이라든지, 투명어항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보여지는 비움과 채움의 변증법적 진리라든지, 대낮에 달()을 들고 있는 소년을 통해 환기되는 꿈과 영원의 세계로의 추구는 이 자화상 시리즈의 철학적 메시지가 단순치 않음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그는 예술가로서의 실존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상적 세계를 꿈꾸는 자로서 시원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본향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의 작품에서 환기되는 불편함의 근원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불편함조차 그의 실존적 의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실존은 완성되지 않은, 완성될 수 없는 답이 전제된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것은 아닐까. 마치 시지프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은폐와 탈은폐의 경계에서

나는 박형근의 작품 속에 여전히 사족과 같은 존재들이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부자연스럽고 거슬리게 느껴진다. 이 글을 쓰는 내내, 그의 작업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닌 모든 것, 일화나 장식에 지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내버린다면 어떤 화면이 될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단순하고 간결한 이미지만으로도 이제껏 묻혀있던 예술적 진정성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줄 수는 없는 것일까를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수잔 손택이 장 콕토와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비교한 사례를 반추해본다. “장 콕토와 브레송 둘 다 영혼의 스타일을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콕토는 낭만적이고, 재치 넘치고, 나른하게 육체의 아름다움에 이끌리지만, 언제나 멋과 인위성으로 스스로를 장식한다. 브레송이 지닌 감성은 육체적 아름다움이라는 헤픈 쾌락이나, 쾌락을 좀 더 영속시키고, 좀 더 계발하고, 좀 더 꾸밈없게 만들려는 인위성을 비껴나가는 반낭만적이고 엄숙한 감성이다.(『로베르 브레송 영화의 영적 스타일』중에서)

궁극적으로 보자면, 예술작품이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이 바로 탈은폐에 있다면 더 많은 것들이 은폐라는 전제조건 하에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형근의 작품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것들이 배제된, 아주 단조로운 형식으로 드러났으며, 사물에의 반응이 한참 늦춰진 상태로 드러났다. 물론 이런 것들이 더욱 강렬하고 격렬하게 미학적 쾌에 근간한 진리를 드러내는 방법론일 수도 있지만, 그의 작품에서 제대로 드러났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작품들은 박형근의 과도기적 모순과 혼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박형근의 작업에 대한 어떤 안이한 칭찬도 그의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저 ‘진행 중인 작품’(working in progress)을 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는 것으로 만족스럽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유경희(미술평론가/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