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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개인전 - There is no there there

2014.11.20 - 12.12
Hyunjung Kim



기억 저편 어딘가의 그곳,
Life Is There





채 다 녹지 않은 눈이 듬성듬성 보이는 언덕의 오르막 산책로, 그 아래 얼어붙은 얕은 도랑을 향해 분홍빛 점퍼를 입은 여자아이가 등을 보이고 서 있다. 이쪽 방죽에는 그 아이를 보는 듯 또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두 아이들. 한 장의 스냅사진 같은, <고요한 숲의 계절>이다.
이토록,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풍경들. 조금은 쓸쓸하거나, 때로는 살짝 감상적이거나, 또 어쩐지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김현정의 풍경그림들은 처음에는 그 섬세하고 사실적인, 혹은 사진적인 표면으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멀리서 바라보면, 혹은 컴퓨터나 스마트기기 화면으로 보면 어쩐지 사진처럼 보이는 그림들. 사진인지 그림인지 헛갈리게 만드는 그림들은 언제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 매인다. “사진처럼 보이게 할 거면 그냥 사진으로 찍으면 되지 않아?” 그 그림들이 실사가 아닌, 사진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들이라면 더더욱 이 물음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그런 의아함을 품고 그림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설 때, 김현정의 풍경 그림들은 조금씩, 그 섬세한 회화적 조형을 드러내며 보는 이 스스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발견하게 한다. <먼 곳에서 온 아침>의 왼편 절반 이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푸른빛, 보랏빛 물감들의 감정 섞인 흘러내림, <숨소리를 따라서>의 조금은 비현실적인, 센티멘털한 색채 조합, 색면처럼 느껴지는 <노래를 위한 숲>의 하늘색 가로등갓 등. 사진 같다는 첫인상은 조금씩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붓놀림 솜씨에 대한 감탄과 더불어 묘한 마음의 울림이 남는다. 무엇일까? 그 울림을 만드는 것은. 그러나, 그래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물음. 그래도 사진 같은 걸. 왜 굳이 이렇게 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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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론가 앙드레 바쟁은 사진의 등장이 회화에 미친 영향에 관해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했다. 보통, 사진의 등장은 회화의 존속에 상당한 위협을 가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바쟁은 그 같은 사진의 위협보다는 사진이 회화에 가져다준 중요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자신이 그린 대상과 동일한 대상을 찍은 사진을 보았을 때 화가를 진정 놀라게 했던 것은 회화를 능가하는 사진이미지의 세밀성이 아니라, 화가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이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음에 대한 깨달음이었다는 사실을.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서양 회화는 실제 대상의 모방적 재현이라는 관념에 구속되어 있어서, 구상회화를 하는 화가들은 자신들이 ‘대상’을 ‘재현’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상을 그 어떤 매체보다도 정확히 잘 재현한 사진을 보았을 때 마침내 화가들은 그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들의 그림들이 사진과 달랐던 것은 단순히 그들의 테크닉이 부족한 탓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눈이 카메라의 렌즈와는 다르기 때문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그들이 그리고 싶었던 것이 카메라 렌즈의 ‘순수한 눈’에 비친 객관적 대상, 혹은 풍경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화가들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대상의 객관적 모습이 아니라, 그들 마음에 아로새겨진 모습, 즉 심상이었다는 사실이 사진이 가져다준 소중한 통찰이었다. 그러한 각성의 결과로 표현주의, 상징주의가 등장했고, 추상마저도 이끌어져 나왔지만, 사진을 닮은 그림들 역시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점은 쉽사리 인정되지 않아왔다. 지금껏도 소위 ‘극사실주의’ 회화를 볼 때 많은 이들이 ‘재현’이라는 목적에 그림을 가두어놓고 사진과의 비교를 통해 그 가치를 가늠하려 한다는 사실이 그 같은 안타까운 몰이해의 사태를 입증한다.
사실 얼핏 보기에 극사실주의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라는 고전적 목적으로부터 그리 멀리 나아가지 못한 채, 회화 이미지를 그 정밀함에 있어 사진 이미지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려고 하는 그림인 듯 보인다. 그로부터 “그냥 사진으로 찍지.”라는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최소한 김현정의 경우, 사진처럼 보이는 그림들의 지향은 다른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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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이 2007년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의, 그 계기가 흥미롭다. 어느 날 계단에서 발견한 기묘한 얼룩에 눈과 마음을 사로잡힌 그녀는 사물이 그것의 객관적 있음을 넘어서는 강렬한 인지적, 정서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존재함과 존재감 사이의 간극이다. 자연스레 관심은 존재감의 문제가 되었다. 그녀는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외적현실이 내감―인지이건 정서이건 간에―기관을 통해 미묘하게 다른 내적현실로 변이되는 양상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리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을 밑그림 삼아.

“현실의 삶은 흐릿하고 모호하지만 나를 강렬한 감정 상태로 이끄는 그 장면들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보다 더 현실적이고 진실하게 느껴진다. [....] 나는 그 장면을 붙잡아 나의 비현실적인 일상에 가장 현실적인 기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러므로 닫혀있던 그녀의 감각들을 활짝 만개시키는 어느 일순간이 그녀 그림의 소재가 된다. 관람자들의 눈에는 평범하게만 보일지도 모르는 그 풍경들이 실은 그녀에게는 아주 특별한 광경이자 순간이었던 것이다. 소소한 일상이 어느 순간 어떤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새로운 존재감을 얻게 될 때, 김현정은 그 찰나를 사진으로 포획한다. 예컨대 동물원의 텅 비고 을씨년스러운 축사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공간과 오버랩되는 순간, 그저 거기 있는 공간을 넘어 시적인 울림을 지닌 특별한 풍경이 된다. 그녀에게 사진은 이 같은 순간적인 특별한 경험을 붙드는 기억의 보조 장치인 동시에, 외적현실과 내적현실 사이의 변이와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조군의 역할을 한다. 인화된 사진은 그것이 담고 있는 풍경의 존재함을 보여주지만, 그 존재감을 오롯이 담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시각적 요소들은 과잉일 것이며, 심적 요소들은 부족할 터. 사진을 밑그림으로 사용하지만, 시각적 과잉을 덜어내고 정서적 결핍을 채워 넣는 가운데 그녀의 그림은 이제 더 이상 사진이 담고 있는 그곳이 아닌 그곳으로 변모한다.
그곳이 더 이상 그곳이 아니라면, 그녀가 왜 꼭 사진처럼 그리는지는 더욱 의아해진다. 아마도 우리는 김현정에게 그림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세계를 순수하고 섬세하게 복합적으로 관찰하는 태도이다.”

그녀에게 그리기 방식은 회화의 표현방식이기 이전에 세계를 향한 주체의 표상 방식이다. 즉, 그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세계와 세계 속 대상들을 보고 느끼고 이해한 바대로 그녀의 삶 속에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세계가 먼저 있고, 그 세계에 대한 경험이 있고, 그에 따라 그림을 그린다. 제 눈으로 ‘관찰한 바대로.’ 만약 그 눈이 ‘순수한 눈’일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사진에 근접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사진을 밑그림으로 사용하는 까닭, 그녀의 그림이 일견 사진처럼 보이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사진이 인간의 눈은 그럴 수 없음을 드러낸다. 인간의 눈은 사진기의 렌즈처럼 주어진 시각정보들을 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지의 경제성과 정서적 요인들, 기억과 상상력의 작용에 의해 시각정보들은 취사선택되어 수용되며, 그 결과 만들어진 표상은 사진 이미지와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표현, 상징, 추상과 같은 식으로 급격히 변용되는 것은 또 아니다. 우리의 마음 속 이미지로서의 표상과 실제 풍경 이미지 사이의 다름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한 결을 타며, 전체보다는 부분에 의해서만 그 차이가 드러난다. 그 다름은 사진과 자기 마음 속 표상에 극도로 촘촘한 비교의 그물망을 던짐으로써만 건져올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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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한 그물 던지기를 뒤집으면 촘촘한 천짜기가 된다. 어쩌면 김현정의 작업방식을 그렇게 불러도 좋겠다. 외적현실로서의 풍경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사진이 과잉 때문이건 결핍 때문이건 놓쳐버린 부분들을 채워 자신의 내적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그녀는 강박적이리만치 세밀한 붓놀림을 통해 작품을 차근차근 꼼꼼히 직조해나간다. 캔버스에 바짝 다가갔다 물러나기를 끝도 없이 반복하면서, 때로는 헛손질로 보이기까지 하는 미세한 붓놀림을 통해, 한 작품에 몇 달씩이나 되는 시간을 들여 그녀가 얻어낸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현실의 이미지이다. 그것이 그녀의 현실이다. 그것은 그녀가 세상과 살을 부대끼며 소통하여 자기 안에 세상을 받아들이고, 다시 자기를 세상 속에 자리매김하는 길고 지난한 과정이다. 우연과 필연, 감각과 인지, 감성이 엇갈리며 전개되는 그 과정은 결코 서둘러질 수 없는, 차근차근 쌓아가야만 하며, 그리하여 종국에는 겹겹이 쌓여 김현정의 삶을 이루고야 말, 결과물로서의 작품 못지않게 중요한 시간들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그 치열한 그리기 작업을 ‘연애’에 비견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지난한 과정 가운데서이다. 외적현실에 내적현실이 겹치고 충돌하면서 그 흔적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마음과 눈이 함께 포착한 풍경과 사진의 풍경 사이의 그 미세한 차이의 결들을, 더하기와 빼기의 붓놀림, 투명한 빛의 색채들을 얹고 또 얹어 층층이 겹치는 작업을 통해 벼려내는 가운데, 김현정은 그러한 결 가다듬기만으로 충분히, 또는 적절히 다룰 수 없는 정서적 대상들과 맞닥뜨리게 되는 듯하다. 대상들이 뿜어내는 정서가 너무나 특별해서 사실적 형상화로는 표명될 수 없을 때, 김현정은 그녀가 화폭 위에 자기 현실을 구축해온 기본 그리기 방식, 즉 리얼리즘적인 그리기를 과감히 버리고, 매우 이질적인 조형화를 통해 그 대상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때로는 색면 조각으로, 때로는 물감의 흘러내림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현실성을 비껴가는 색채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대상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결과적인 이질성은 필경 보는 이의 눈을 강하게 사로잡으며, 그로써 그녀의 그림을 사진 같은 그림을 초월한 다른 종류의 그림으로 만든다. 이 부분이 아마도 그녀의 내적현실의 코어를 이루는 부분, 카메라의 눈은 결코 잡아낼 수 없는 표상일 것이다.
이 과정에 단순히 그 대상이 그녀로부터 자아낸 정서만 연루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림을, 혹은 그녀의 내적현실의 표상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에는 너무도 당연히 그녀의 조형적 감수성이 개입한다. 그리하여 그림은 조금 더 주관적으로 변형되는 가운데 그 자체의 완결성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내적현실의 풍경은 눈의 한계, 기억과 정서의 영향뿐만 아니라 조형적 상상력이 함께 직조해내는 한 폭의 커다란 페르시안 카펫과도 같은 것이 된다. 이런 김현정의 작품들을 ‘정서적 리얼리즘’(emotional realism)이라 부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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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스스로가 정서를 덧입힌 재현을 추구한 당연한 결과로, 그녀의 그림이 보는 이들에게 호소력을 갖게 되는 것 역시 탁월한 테크닉으로 얻어낸 풍경의 사실성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정서가 배어나오는 지점이다. 물론, 보는 이들이 김현정의 내적 표상의 결을 고스란히 따라가기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탁월한 색채감, 영민한 붓놀림은 그녀가 재현하고자 애썼던 어떤 정서를 가시화하는 데 성공한 듯하다. 그러한 정서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때, 우리는 그녀의 풍경그림이 결코 현실의 무덤덤한 재현이 아니라는 것을 어림짐작함과 동시에, 그 풍경에서 풍경 이상의 것을 길어 올릴 수 있다.
나는 작업실에서 김현정의 전작 <기다림은 기억보다 더 눈부시다>를 보는 순간 김연수의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 들어있던 어느 단편을 떠올렸고, 그 단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연상했던 노오랗게 따뜻한 햇살을 떠올렸고, 그와 함께 어릴 적 그 햇살 아래 뛰놀던 행복한 시절을 되살려내었다. 놀랍게도, 김현정의 그 그림은 그녀가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보낸 외가 주변 농장의 풍경이었다. 어디 마들렌뿐이랴. 그것이 글이건 그림이건, 한줌 햇살의 놀라운 묘사만으로도 우리의 굳게 닫힌 기억의 문 뒤 저편에 있던 그곳이 지금 이곳으로 다시 소환되어 우리를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김현정의 작품은 거기 저곳을 여기 이곳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리곤 여기 이곳의 보는 이들을 거기 저곳으로, 감각의 현실 너머로 데려간다. 현실 속에 감추어진 현실을 발견하는, 그리하여 세상과, 또 자기 자신과 새롭게 만나는 특별한 경험. 결코 보장되어 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김현정의 어떤 작품들은 막강한 방아쇠가 되어 우리의 지각에 불을 댕긴다.
이런 김현정의 작품에 대한 비평에 ‘아우라’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우라란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삶에 덧입혀줄 수 있는 후광이기 때문이다. 그저 조각나버린 편린들로 흩어져 시간의 물결을 따라 흘러가버리는 삶의 순간들을 건져올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가닥으로 이어낼 수 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은 빛나는 후광을 등에 업은 찬란한 표상으로 솟구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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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김현정의 이번 개인전 제목은 <There is no there there>이다.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시에서 따온 이 제목은 스타인이 어릴 적 살던 오클랜드를 다 커서 다시 방문했을 때의 상실감이 담긴 표현이다. 기억 속 오클랜드는 더 이상 오클랜드에 없더라는 그 쓸쓸한 소회는 그런데 김현정의 작품들이 전달하는 감성보다는 피천득의 <인연>의 감성과 더 가깝다. 그토록 애련했던 아사코를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했다던 문인의 안타까움.
그러나 그 상반된 감성들이 한 목소리로 가리킨다. 우리의 소중한 그곳 ―There― 은 오직 우리의 기억 저편에서만 고스란히 간직될 수 있음을. 현실 속 여기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표상, 우리의 재현, 우리의 글, 우리의 그림 속에서 다시 그 아름다움을 오롯이 회복할 수 있음을. 김현정의 그림은 그리하여 거기 그곳의 안타까운 아름다움 대신 찬란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겨울로 넘어가는 이 늦가을, 곧 다가올 흰 눈 위 눈부시게 서릴 한 줄기 햇살처럼.

 


정수경 (미학/미술비평)